발전원 늘려도 흔들리는 계통…해답은 ‘소비자 주도 유연성’
기사 원문 : https://www.elec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363115
재생에너지 30% 시대, 발전 확대만으로는 감당 못하는 계통 불안정
DR 한계 넘는 요금제 기반 전환…전기차·분산자원, 소비자를 계통 주체로
검침기에서 전력망 두뇌로, AMI 2.0이 여는 유연성 플랫폼 시대
에너지전환은 종종 재생에너지 확대나 원전 비중 논쟁으로 단순화된다. 그러나 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의 본질은 훨씬 구조적이다. 전환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전력 계통은 더 불안정해지고 이를 흡수할 ‘유연성(flexibility)’이 확보되지 않으면 탄소중립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이런 가운데 에너지·전력 업계 전문가들은 소비자 자산을 활용한 유연성 확보와 AMI 2.0 기반 에너지 디지털화를 핵심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에너지전환은 수단, 목적은 탄소중립”
전문가들은 에너지전환의 개념부터 재정립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에너지전환은 재생에너지 확대나 원전 감축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탄소중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 전력뿐 아니라 수송, 건물, 열 부문까지 동시 전환이 이뤄져야 하며 그 과정에서 전력의 역할은 지금보다 훨씬 커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전력수요와 공급의 구조가 과거와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태양광과 풍력 같은 변동성 재생에너지가 급증하는 동시에 AI·데이터센터·전기차 확산으로 전력수요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발전소 출력만 조절해 수급을 맞추는 방식은 한계에 직면했다는 진단이 나오는 이유다.
◆재생에너지 30% 시대, 계통은 버틸 수 있나
정부는 2035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30% 이상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 경우 계통 운영의 불확실성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태양광 출력 급변, 풍력의 간헐성, 지역별 발전 편중 문제가 동시에 나타나게 된다. 여기에 데이터센터 등 대규모 전력 소비처가 도심 인근에 집중되면 계통 부담은 더욱 가중된다.
그동안 해법으로 제시된 ESS, 양수발전, 가스터빈 등 ‘계통 중심’ 유연성 자원은 막대한 비용이 수반된다. 설비 투자 비용은 결국 전기요금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사회적 수용성 문제도 피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지난 10월 국제에너지기구(IEA)도 재생에너지 2025 보고서에서 전 세계 재생에너지 용량이 2030년까지 두 배로 증가해 4600GW가 추가될 것으로 전망했지만 이를 위해서 낮은 비용과 빠른 인허가 그리고 광범위한 사회적 수용이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비자’가 빠진 전환은 지속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이 ‘소비자 주도’ 유연성이다. 전기차, 히트펌프, 주택 태양광, 가정용 ESS 등 분산된 소비자 자산을 계통 안정에 활용하자는 접근이다. 정부 역시 2035년까지 신차의 70% 이상을 전기차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가장 비용 효율적인 해법이지만 현실에서 참여를 끌어내기는 쉽지 않다.
현재 국내 수요반응(DR) 제도는 대부분 단발성 이벤트에 가깝다. 특정 시간대 전력 사용을 줄이면 소액의 보상을 받는 구조로는 소비자가 자신의 자산을 상시적으로 제공할 유인이 부족하다.
정범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는 “유연성은 비상 상황에서만 쓰는 옵션이 아니라 상시적으로 작동하는 자원”이라며 “지금의 DR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해법은 ‘요금제 기반 유연성’
해외는 이미 방향을 전환했다. 영국 등은 전기차를 계통 자원으로 활용하는 V2G 요금제를 도입해 소비자가 월 단위로 체감할 수 있는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옥토퍼스에너지와 같은 기업은 미터링 기반 맞춤형 요금제를 통해 단순 보상을 넘어 요금 절감과 수익 창출을 동시에 가능하게 했다.
전문가들은 국내 역시 유연성을 요금제와 결합한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력 사용 패턴과 자산 제공 정도에 따라 요금이 달라지는 체계가 구축돼야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를 위해서는 실시간에 가까운 데이터 수집과 제어, 예측 기능이 필수적이다.
◆AMI 2.0, ‘검침기’에서 ‘유연성 플랫폼’으로
이러한 전환의 기술적 기반으로 주목받는 것이 AMI 2.0이다. 기존 AMI 1.0이 검침 자동화와 데이터 수집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AMI 2.0은 유연성 자원을 관리·제어하는 플랫폼 역할을 맡게 된다.
최근 열린 스마트에너지플랫폼 심포지움에서 정구형 한국전기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재생에너지 변동성 확대와 수요측 분산형자원(DER) 증가로 역조류·전압 변동·혼잡 등 배전망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며 “지역 단위 유연성을 실시간으로 계산하고 검증·정산할 수 있는 AMI가 핵심 인프라”라고 강조했다.
AMI가 단순 계측 장비가 아니라 지역 유연성 시장(LFM; Local Flexibility Market)을 떠받치는 핵심 기반이라는 설명이다
한국전력은 AMI 2.0 도입을 전제로 망 운영 솔루션을 구체화하고 있다. 1분 단위 실시간 계량이 가능한 AMIGO 계기 도입, MDMS·ADMS 연계를 통한 실시간 가시화, 제주·경북 실증을 통해 기술 검증도 마쳤다. 2026년부터는 서버 구축과 신설 계량점 AMIGO 부설, 검정만료 계기 교체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한전KDN 역시 AMI가 검침을 넘어 에너지 데이터 플랫폼으로 진화한다며 Meta e-Hub, City-EMS, RE100, 탄소거래 등으로 서비스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
◆ 전면 보급보다 ‘목적형 구축’
전면 보급이 아니라 선별적·목적형 구축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전기차 충전기, 주택 태양광, 히트펌프 등 유연성 잠재력이 큰 지점에 집중하고 로컬 엣지 AI를 활용해 클라우드 장애 시에도 자율 판단·제어가 가능한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앙 서버에 모든 데이터를 모으는 방식으로는 재생에너지 확대 이후의 복잡한 계통 상황을 실시간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숨은 주택 태양광이 10GW를 넘어설 경우, 지금과 같은 15분 단위 데이터로는 정확한 예측이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역·가구 특성을 반영한 로컬 예측 없이는 출력 제한과 계통 불안정이 반복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도심 갈등의 해법, 그리고 아파트 모델
AMI 2.0 기반 소비자 유연성은 송전선로 건설이나 발전소 증설에 따른 도심 갈등을 완화하는 대안으로도 주목된다. 물리적 인프라 확충 대신 디지털 인프라와 참여 구조로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이다.
정 교수는 “주택 태양광 10GW와 420만 대 전기차를 가상발전소로 연결할 수 있다”며 “유연성 수익을 관리비로 환급하면 참여 유인이 명확해진다”고 말했다.
신축·리모델링 단지 유연성 설비 의무화, 커넥티드·탄소중립 아파트 인증, 데이터 허브 개방 등 제도 정비 필요성도 함께 제기됐다.
◆‘마지막 퍼즐’을 맞출 시간
탄소중립을 향한 전력 전환은 이제 중반을 넘어섰다. 발전원 확대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고 계통 유연성 확보 없이는 전환 속도 자체가 늦춰질 수밖에 없다는 데 업계의 의견이 모인다.
AMI 2.0과 소비자 주도 유연성이 ‘전력 전환의 마지막 퍼즐’로 불리는 이유다.
전환의 성패는 기술이 아니라 설계에 달려 있다. 소비자가 참여하고 보상을 체감하며 데이터로 연결되는 구조가 갖춰질 때 전력 시스템은 비로소 공급 중심에서 참여·데이터 중심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평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