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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 배터리가 전력망 살린다…V2G가 만들 ‘전기차와 계통의 미래’
제주 쏘카터미널서 국내 유일 V2G 계통 연결 실증
B2B·B2C 실증 동시 가동…렌터카·도민 참여
현대차, V2G 참여 차량 배터리 보증 유지 결정
제도가 상용화 좌우…“사업성 확보·법적 지위 선행돼야”

현대차그룹이 V2G 실증사업을 하고 있는 제주 쏘카터미널. [사진=오철]
현대차그룹이 V2G 실증사업을 하고 있는 제주 쏘카터미널. [사진=오철]

제주공항에서 차로 3분 거리인 쏘카터미널. 1층 주차장에 들어서자 아이오닉9과 EV9이 양방향 충전기에 연결된 채 전력망으로 전기를 내보내고 있었다. 전기차 배터리에 저장된 전력을 실제 배전 계통과 양방향으로 주고받는 V2G(Vehicle-to-Grid) 기술의 실증 현장이다. 기존 국내 V2G 실증이 건물 내부에서 전력을 주고받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이곳은 배전망에 직접 연결된 국내 유일의 그리드 연결 실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12월부터 쏘카 렌터카 20대를 활용한 기업 간(B2B) 실증을, 올해부터는 제주도민 40명을 대상으로 한 기업·소비자 간(B2C) 실증을 동시에 가동하고 있다. 분산에너지 특별법 시행에 맞춰 전기차가 이동수단을 넘어 전력 유연성 자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

◆“배전망에서 직접 끌어왔습니다”…계통 연결 현장

주차장 한쪽에 ‘V2G 존’이라는 별도 구획이 눈에 들어왔다. 양방향 충전기 15기가 일렬로 세워져 있고, 그 사이에 아이오닉9과 EV9이 충전 케이블을 물고 서 있었다. 김민형 현대차 EV V2X 책임매니저가 주차장 너머 전봇대를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V2G 구역에서 충방전 중인 전기차들 [사진=오철 기자]
V2G 구역에서 충방전 중인 전기차들 [사진=오철 기자]

“저쪽 배전망에서 지하로 전선을 끌어와 각 충전기에 연결했습니다. 기존 국내 실증이 건물 안에서 전력을 주고받았다면, 이곳은 실제 계통에 직접 물려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다만 계통에 직접 연결하기 위한 인증 기준이나 연결 규정이 아직 마련돼 있지 않아, 한전과 협의해 규제 샌드박스 특례로 진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기차 충전기 디스플레이에는 ‘V2X 실행 중’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7.00kW’라는 수치가 표시돼 있었다. 배터리에서 전력망 쪽으로 전기가 나가고 있다는 뜻이다. 전기차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화면에도 동일한 메시지와 배터리 잔량(SoC)이 실시간으로 표시됐다. 김 책임은 “이 화면 하나를 차량에 구현하는 데만 6개월에서 1년이 걸렸다”며 “전기차 개발 일정에 포함시켜야 하는 만큼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말했다.

B2B 실증은 렌터카가 대여되지 않는 유휴 시간에 자동으로 충방전하는 구조다. 차량 한 대당 하루 평균 10kWh를 방전하며, 상시 3~5대가 계통에 연결된다. B2C는 아이오닉9·EV9 보유 도민 40명에게 자택 양방향 충전기를 무료 설치하고 충전 요금을 전액 지원하는 방식이다. 취재 시점 기준(14일)으로 실제 설치가 완료돼 운영 중인 가구는 3곳이었다.

주철규 현대차 EV V2X 팀장은 “직업군과 거주지를 고르게 배분했다”며 “제주는 오후 2~4시에 전력이 남고 6~8시에 부족한 패턴이 있어, 어떤 생활 패턴에서 충방전 효율이 높은지 실증 데이터를 통해 분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렌터카 고객이 반납 후 충전 케이블을 연결하지 않고 떠나는 경우가 많다”며 “상용화 단계에서는 차를 꽂아두는 것 자체가 경제적 혜택으로 이어지는 서비스 설계가 핵심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기차가 V2G 기능을 통해 방전하고 있다. 사진은 충전기(위)와 전기차(아래) 화면. [사진=오철 기자]

◆‘배터리는 건강검진처럼 관리’…보증 유지 배경

V2G 확산의 최대 걸림돌은 기술이 아니라 소비자의 배터리 불안이다. 충방전을 반복하면 배터리 수명이 줄지 않느냐는 우려가 참여를 가로막는 심리적 장벽이 돼 왔다. 과거 실증에서는 참여 차량의 배터리 보증을 무효화하기도 했고, 별도 보험으로 보상하는 방안이 검토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차그룹은 이번 제주 실증에서 참여 차량에도 기존 배터리 보증 조건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충방전이 배터리 성능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는 기술적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주철규 팀장은 “요즘 트렌드가 5C~6C(10~12분 만에 완충하는 속도)까지 올라가는 초급속 충전인데 그 속도가 배터리 열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며 “반면 V2G 실증에서 사용하는 방식은 AC 11kW급 충전기의 저속 충방전이다. 배터리에 부담이 거의 없는 속도다”라고 설명했다. 급속충전이 짧은 시간에 전력을 밀어넣어 열과 화학적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것과 달리, V2G에서 사용하는 완속 방식은 배터리에 주는 부하가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배터리 관리 방식을 건강검진에 비유하기도 했다. 주 팀장은 “배터리는 0과 1로 결과가 확정되는 디지털이 아니라 같은 조건에서도 반응이 달라질 수 있는 화학”이라며 “그래서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충전기에 물려 있는 동안 배터리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이상 징후가 감지되면 방전을 즉시 중단시키는 등 예방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B2B와 B2C 양쪽에서 배터리 열화 데이터를 축적하며 추이를 지속 점검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특이 사항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 같은 흐름은 글로벌 추세와도 같은 방향이다. BYD와 르노가 V2G 참여 차량의 배터리 보증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했고, 폭스바겐도 지정 충전기 사용 조건으로 보증을 유지하고 있다.

◆상용화 관건은 제도…“사업성 확보 없인 어렵다”

V2G가 전력 시스템에 기여하는 가치는 실증 현장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됐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전력 수급의 변동성은 커지고, 이를 조절할 유연성 자원의 필요성도 함께 커진다. 주철규 팀장은 “재생에너지 잉여 전력을 전기차에 저장했다가 부족할 때 돌려주면 별도의 대규모 ESS를 건설하지 않아도 전력망 안정에 기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핵심 문제는 이 기여가 경제적 보상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에 있었다.

주철규 현대차 EV V2X 팀장이 현대차그룹의 V2G 실증 사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오철 기자]
주철규 현대차 EV V2X 팀장이 현대차그룹의 V2G 실증 사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오철 기자]

이어 주 팀장은 “V2G를 통해 전력 유연성을 확보하면 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하지 않아도 되는 효과가 있다”며 “그런데 그 사회적 가치를 참여자에게 돌려주는 보상 체계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사업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V2G는 전력이 남는 시간에 싸게 충전했다가 수요가 높은 시간에 비싸게 방전하는 구조인데, 한국은 한전이 송배전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어 시간대별 전력 가격차가 크지 않기 때문에 현행 제도하에서 차주가 V2G 참여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은 미미할 것으로 보인다. 주 팀장은 “한국에서의 현실적 목표는 차주가 최소한 전기차 충전요금 부담 없이 차를 운행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라며, 영국 옥토퍼스에너지의 V2G 요금제(12시간 이상 연결 시 충전 무료)를 참고 모델로 꼽았다.

현장에서 확인된 상용화 핵심 과제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V2G 참여자가 체감할 수 있는 전용 요금제 신설 ▲전기차의 분산에너지자원 법적 지위 확보 및 전력거래소를 통한 전력 판매 허용 ▲양방향 충전기 보조금 확대가 그것이다.

현대차가 제도 정비를 상용화의 전제 조건으로 강조하는 반면, 한전 측 시각은 다소 다르다. 지난 3월 열린 ‘2026 EV 충전인프라 심포지엄’에서 한전 관계자는 “태양광이 대용량 사업에서 시작해 소용량으로 일반화된 길을 V2G도 걸어야 한다”고 밝혔다. 사업성 있는 제도가 먼저냐, 충분한 참여 규모가 먼저냐. V2G 상용화를 둘러싼 이 논쟁은 아직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V2G 구역에서 충방전 중인 전기차들 [사진=오철 기자]

정부는 34개 기관이 참여하는 V2G 민관협의체를 운영하며 마스터플랜을 수립 중이다. 제주 2028년·전국 2030년 상용화를 목표로 한 로드맵을 6월 발표할 예정이다.

김민형 책임매니저는 “정부가 초기에 시장 조건을 충분히 열어주고 이후 점차 조정해 나가는 방식이 바람직하다”며 “제도적 기반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민간에 먼저 투자를 요구하는 것은 순서가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주 팀장은 “전기차 판매 확대는 자동차 회사에도 분명한 동기이기 때문에 V2G에 대한 준비는 계속하고 있다”며 “제도적 여건이 뒷받침된다면 사업을 본격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은 이미 마련돼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현대차그룹은 향후 출시되는 전기차 전 차종에 V2G 기능 탑재를 계획하고 있으며,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그리드코드 인증을 완료해 현지 V2G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전기신문 | 2026.05.28 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