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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에너지·AI가 쏘아 올린 전력난, 인프라 확충 핵심 열쇠는 ESS
ESS 보급 확산은 韓 배터리 기업에 호재, ‘비리튬’ 계열에도 관심 증가
미국·유럽 성공 비결은 ‘정당한 가치제공’ 韓도 ‘유인책’ 마련 시급

SK가스와 SK이터닉스가 2025년 3월 상업 운전을 개시한 미국 텍사스의 ESS 프로젝트 단지. [사진=SK가스]
SK가스와 SK이터닉스가 2025년 3월 상업 운전을 개시한 미국 텍사스의 ESS 프로젝트 단지. [사진=SK가스]

전력망이 역사상 가장 큰 도전에 직면했다. AI 시대의 도래 이후, 전력은 인프라를 넘어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자원으로 변화했고 각 국가와 기업들이 AI 시대에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전력망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이다.

AI의 ‘두뇌’라 불리는 그래픽처리장치(GPU)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를 지탱할 전기가 필수적이다. 당장 부족한 전력을 해결하기 위해 화석연료 발전소를 짓자니 탄소중립 문제와 시간이 걸리고 신재생에너지를 급격하게 늘리자니 변동성이 발목을 잡는다. 때문에 24시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한 해법으로 전 세계가 에너지저장장치(ESS, Energy Storage System)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 칩보다 급한 ‘파워’… 빅테크 수장들이 에너지에 사활 거는 이유

에포크 AI(Epoch AI) 분석에 따르면, 생성형 AI는 입력 데이터가 길어질수록 전력 소모가 가파르게 상승한다. 특히 최대 컨텍스트를 활용한 질문은 일반 질문보다 130배 이상 많은 전력을 소비하며, 이는 가정용 전자제품 사용량을 상회하는 수준이다.[사진=에포크AI]
에포크 AI(Epoch AI) 분석에 따르면, 생성형 AI는 입력 데이터가 길어질수록 전력 소모가 가파르게 상승한다. 특히 최대 컨텍스트를 활용한 질문은 일반 질문보다 130배 이상 많은 전력을 소비하며, 이는 가정용 전자제품 사용량을 상회하는 수준이다.[사진=에포크AI]

챗GPT와 제미나이 같은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과거 데이터센터가 전력망의 한 부분만을 사용했지만 지금의 AI 데이터센터는 원전 1기와 맞먹는 전력을 사용하고 있다.

때문에 인프라 확충 속도가 소프트웨어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전력 부족이 AI 발전을 가로막는 병목현상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주요 빅테크 수장들이 위기감을 드러내는 이유다.

샘 알트먼 오픈AI CEO는 2025년 9월 직원들에게 보낸 내부 이메일에서 “2033년까지 250GW 규모의 데이터센터 확보”라는 목표를 밝혔다. 이 규모는 미국 전체 전력 소비량의 약 1/3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사티야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도 최근 ‘향후 2~3년간 AI 칩 등 공급 과잉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칩이 아니라 파워(전력)”라고 말하기도 했다.

AI 데이터센터가 단순히 전력사용량이 많은 것을 넘어 전력 부하가 순간적으로 급변한다는 점 또한 전력망 안정성에 치명적인 요소다. 특히 화석연료 발전소가 줄고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수급 불안정성은 더욱 커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핵심이 바로 ESS다.

◆ 미국·유럽·중국은 ESS 시장 선점에 사활

미국과 유럽이 ESS 설치에 속도를 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 빅테크 기업들은 안정적인 전력 확보를 위해 ESS 없이는 투자를 결정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2025년 3분기까지 5.3GW의 에너지저장장치를 설치했으며, 이는 2024년 전체 설치량을 이미 넘어선 것이다. 텍사스는 2021년 대정전 사태 이후 사막 지대에 대형 ESS 단지를 건설해 피크 시간에 전기를 되파는 수익 모델을 정착시켰다.

캘리포니아 전력망(CAISO)의 2026년 1월 5일 실시간 수급 현황. 재생에너지(Renewables) 비중이 높은 상황에서 배터리(Batteries)가 전체 공급량의 약 19.3%(5,082MW)를 차지하며 전력망 안정화의 핵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사진=캘리포니아 ISO 홈페이지]
캘리포니아 전력망(CAISO)의 지난 5일 실시간 수급 현황. 재생에너지(Renewables) 비중이 높은 상황에서 배터리(Batteries)가 전체 공급량의 약 19.3%(5082MW)를 차지하며 전력망 안정화의 핵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출처=캘리포니아 ISO 홈페이지]

캘리포니아는 재생에너지 의존도가 높아 사실상 의무화 수준으로 ESS를 설치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독립시스템운영국(CAISO)에 따르면 현재 새롭게 접속되는 전력 설비 중 절반 이상이 배터리 저장장치로 2025~2028년 약 8.2 GW의 추가 배터리가 예정돼 있으며, 최종 목표는 2045년까지 52GW다.

유럽에서도 ESS에 대한 수요가 더욱 증가하고 있다. ‘솔라파워 유럽’이 발표한 ‘유럽 배터리 저장 시스템 시장 전망 2025-2029’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은 2024년 21.9GWh를 새로 설치해 누적 용량 61.1GWh를 기록했다. 발부르가 헤메츠베르거 솔라파워 유럽 CEO는 “유럽이 이미 태양광 시대에 진입했다면, 배터리 저장 시대는 이제 막 시작됐다”며 “지금이야말로 유럽 정책 결정자들이 유연하고 전기화된 에너지 시스템의 중심에 배터리를 두어야 할 때”라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은 국가 차원에서 ESS를 ‘독립적인 수익 창출 자산’으로 정의하고, 2027년까지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 배터리 용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계획이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이 지난달 발표한 ‘세계 에너지시장 인사이트’에 따르면 중국의 ‘15.5(2026~2030년) 경제계획 기간’에는 전력계통 안정을 위한 ESS가 에너지시스템의 운영 안정성을 좌우하는 핵심이 될 전망이다.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NDRC) 또한 지난해 9월 ‘2024~2027년 신전력 시스템 개발 가속화 전략’을 통해 2027년까지 약 2500억위안(약 52조원)을 투자해 BESS 용량을 180GW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 글로벌 ESS 붐, 한국 배터리에 돌파구 역할

LG에너지솔루션 미국 미시간 홀랜드 공장 모습.[사진=LG에너지솔루션]
LG에너지솔루션 미국 미시간 홀랜드 공장 모습.[사진=LG에너지솔루션]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ESS가 전력망의 필수 인프라로 격상되자 그 수혜는 고스란히 앞선 배터리 기술력을 보유한 한국 기업들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전기차 시장의 수요 정체로 위기론이 대두됐던 국내 배터리 업계에 ESS가 강력한 돌파구가 된 셈이다.

특히 북미와 유럽 시장을 중심으로 성과가 잇따르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2025년 7월, 미국 시장에서 단일 계약 기준 역대 최대 규모인 약 6조 원 규모의 LFP(리튬인산철) ESS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삼성SDI 역시 2025년 말, 미국 대형 에너지 기업과 2조 원 규모의 LFP 배터리 공급 계약을 맺으며 보급형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SDI는 독자적인 방열 설계가 적용된 ‘SBB(삼성 배터리 박스) 2.0’을 앞세워 화재 안전에 민감한 데이터센터 수요를 집중 공략 중이다. SK온 또한 2025년 하반기 미국 플랫아이언(Flatiron)과 1GWh 규모의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첫 수주에 성공했다.

◆ 리튬 대신 ‘장주기(Long-Duration)’와 ‘비리튬’ 중요성도 커져

중국에서 가동을 시작한 700MWh 바나듐 흐름 전지. [사진=중국 롱케 전력 홈페이지]
중국에서 가동을 시작한 700MWh 바나듐 흐름 전지. [사진=중국 롱케 전력 홈페이지]

ESS 시장의 팽창과 함께 기술 트렌드에도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AI 데이터센터의 대용량화로 4시간 이상의 긴 방전 시간이 요구되면서 리튬을 넘어선 ‘비리튬 계열’ 기술이 경쟁에 뛰어든 모양새다.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는 반응 속도가 빠르지만 장시간 저장 시 비용이 급격히 상승하고 화재 위험이 있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따라 글로벌 시장은 장시간 전력을 저장하는 장주기(Long-Duration) ESS를 중심으로 리튬과 비리튬의 역할 분담이 뚜렷해지는 추세다.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VRF) 등 다양한 플로우 배터리와 나트륨-황(NaS) 계열, 철·아연 기반 배터리 등이 핵심 후보군이다.

글로벌에서는 중국과 영국이 주목받고 있다. 중국은 비리튬 장주기 ESS를 국가 전략으로 격상, 2030년까지 23GW 설치를 목표로 지난해 12월 세계 최대 규모인 175MW/700MWh급 바나듐 흐름전지 플랜트를 완공했다. 영국 전력가스 규제기관 Ofgem 또한 2025년 3월, 장주기 전력저장(LDES) 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Cap & Floor 제도’를 확정하고 국가전력운영기관(NESO) 전략에 따라 2030년까지 22GW를 도입할 계획이다.

미국 역시 대형 공익사업자 SRP(Salt River Project)가 ‘프로젝트 뉴 호라이즌(Project New Horizon)’이라는 철 기반 흐름전지(5MW/50MWh) 파일럿 사업을 발표했으며 이는 1125가구에 10시간 연속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규모다. 우리도 지난 2023년 ‘에너지스토리지산업 발전전략’을 통해 기술 개발을 지원 중이나, 주요국에 비해 여전히 실증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분석이다.

◆ 시장 없는 보급은 없다…’가격 신호’ 우선돼야

글로벌 ESS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지만 ‘배터리 강국’인 한국의 현실은 경직돼 있다. 전기차 시장의 정체 속에서 ESS가 배터리 산업의 확실한 돌파구가 돼야 하지만 국내의 폐쇄적인 전력 시장 구조가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재 국내 전력 시장은 가격 변동성이 인위적으로 억제돼 있다. ESS의 핵심 수익 모델은 전기가 쌀 때 저장해 비쌀 때에 파는 ‘시세 차익’인데 가격 차이가 작다 보니 민간 기업이 수천억 원을 들여 ESS를 설치할 유인이 없는 실정이다. 과거 ESS 화재 사태 이후 안전 기준은 대폭 강화됐으나, 기존 인센티브와 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가중치 제도 등이 일몰되면서 수익 모델은 오히려 후퇴했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반면 미국과 유럽은 ESS를 통해 실질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시장 구조를 이미 완성했다. 미국은 세액공제(ITC) 대상에 ESS를 포함시키고, 피크 절감 및 보조 서비스 시장 참여를 제도화했다.

특히 전력회사가 대형 배터리를 설치해 노후 발전소를 대체하거나 송전망 증설을 늦추는 것으로 인정받으면 비용 절감분을 가치로 보상해 준다. 미국 에너지저장협회와 우드맥켄지의 발표에 따르면, 이러한 선순환 구조에 힘입어 향후 5년간 미국의 ESS 설치량은 약 93GW에 달할 전망이다.

유럽 역시 실시간 가격 신호를 강화해 ESS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풍력·태양광 비중이 높은 국가일수록 주파수 조정 및 혼잡 완화 등 계통 서비스에 대해 별도의 보상 체계를 마련했다. ESS 사업자가 시장 논리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도록 설계한 것이다.

우리나라도 한전 주도의 계통 안정화 ESS 사업과 전력거래소의 ESS 중앙계약시장 등이 열리고는 있지만 공공 중심의 계통 기여 방식에 머물러 순수 민간 사업자의 참여는 극히 제한적인 상황이다.

서강석 한국ESS산업진흥회 사무국장은 “미국과 유럽의 성공 비결은 시장 설계에 있다”며 “전력 도매가격이 실시간 수급 상황을 반영해야 차익 거래 유인이 생긴다. 주파수 조정이나 예비력 제공 등 ESS가 전력망 안정에 기여하는 가치를 정당하게 보상하는 보조 서비스 시장의 정상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전기신문 | 2026.01.06 보도